차가운 눈송이가 밤새 내리면, 어느새 더럽고 추한 몰골들은 전부 새하얗게 덮여있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추운 곳에 내리는 결정의 덩어리가 아닌 정화의 의미였다. 적어도 전쟁터에 있는 이들만은 그리 생각했다. 딱딱하게 굳은 피와 살점 조각의 비린내마저 전부 덮어버리길, 눈의 색만큼이나 하얀 무사가 빌었다. 눈이 쌓인 둔덕에 올라서서 떨어지는 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밟고 있는 곳이 순수하게 눈으로 쌓인 곳이 아니라 시체들을 덮고 쌓인 곳이라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피는 늘 가까운 곳에 있기 마련이기에, 당연하다는 것처럼 사내에게서 흘러내려서 떨어진다. 깊게 베인 팔의 상처를 부여잡는 것은 이미 버릇이 되었다. 검을 다루는 팔이기에 어느 곳보다도 많이 깎이고 베였다.
눈부실 정도로 하얀 눈을 빨갛게 적셔가는 광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맨발이 아니어도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이 싫지 않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조용히 하얗게 내리는 그 풍경이 어두운 공간을 채웠다. 제 머리색을 닮은 점도, 남자는 퍽 좋아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백야차는 어디냐? 급한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싸움이 끝나도 추격은 끝나지 않는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환히 웃으며 얼굴이 달덩이처럼 하얀 여자는 책을 덮었다. 닳고 헤져 너덜너덜한 것은 여자의 고운 손에 들려있는 게 제 잘못인 것처럼 바닥에 붙었다. 한자로 적힌 제목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벌써..? 더 듣고 싶은데."
동그란 머리통을 쑥 내밀고 아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분명, 전쟁통이 아니었다면 절차를 밟고 교육에 들어갔어야 할 쯔음의, 눈망울 안에 하나 이상의 것을 담지 않는 아이. 오래된 이야기라도 그에게는 긴밤을 지새울 수 있을만큼 이색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를 바르게 기르고자 하는 누님은 서둘러 아이를 재우려했다. 아무리 입을 삐죽이고 불평해보아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아이가 자신을 안은채 조르자 별안간 기침을 토해냈다. 괜찮아요? 지병이 있는 친누님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치료를 받아도 또 다시 도지고 덧나는 병. 말하자마자 기침에 섞여나온 피에 아이는 기함했다. 그렇게 말로만 전해 들었던 죽음이라는 게 온걸까 하고 불안해하며 떤다. 죽으면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못하게 된다고 했었다. 그렇게 되는 걸까,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내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쓰다듬는다.
"소스를 먹었을 뿐이란다."
"아..."
아이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잠들지 못했다. 눈오는날 밤은 너무 조용해서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귓가를 간질였다. 미처 다 듣지 못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뒤척이면, 바로 옆에 누워있는 누이의 흰 얼굴이 자그마한 달빛을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아무 미동이 없는 모습은 가끔 아이를 겁먹게 만들었다. 지금도, 잠시동안이지만 죽음이 누이를 데려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리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눈이 그치기 전까지 그럴것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감에 슬그머니 문쪽으로 발돋움해 이동한 순간이었다.
ㅡ쾅
무게가 제법 있는 것이 떨어진 소리, 우지끈하며 부서져내리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친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이런 시각에 소란스럽게 들어오는 손님은 없다. 분명 도둑일텐데, 아이는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오는 도둑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진짜 도둑이면 어떻게 하지? 아이는 동그란 눈을 굴리다 검술 도장에서 쓰던 목도를 조막만한 손으로 쥐었다. 문에 착 붙은채로 작은 틈을 벌려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요란스럽던 소리가 무안할정도로 사방은 고요해졌다. 잘못 들은 건가? 그렇다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던 감각에 아이는 한차례 몸을 떨고 문을 활짝 열었다. 시선을 똑바로 고정하자 그제야 제대로 보인다.
"...피...!"
걸어간 방향을 알려주듯 길을 따라 떨어져있는 피의 웅덩이에 아이는 몸을 굳혔다가 눈을 비볐다. 다시보아도 그대로 있는 걸 보니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마당은 꽤 넓어서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문채 조심이 한발 딛었다. 그 핏자욱을 따르려고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담쪽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지 못했더라면.
"..........."
"........"
일순, 아이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방울눈을 했다. 피를 흘리며 들어온 도둑은 하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게 칭칭 감고 있지도 않았고, 피부도 누이의 것처럼 빛을 받아 환하다. 마주한 시선의 빛은, 자신의 것과 같은 적빛이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움찔댔다. 긴장으로 인한 것인지, 동질감에 놀라움을 느낀 것인지 알 수 없다. 문득, 누이가 읽어주었던 요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저건 사람이 아니라 요괴일지도 몰라. 설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이가 달싹이던 입술을 벌리자, 하얀 사람은 쉿, 하고 곧게 뻗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저도 모르게 옮기려던 발도, 무언가를 말하려던 입도 동작을 멈추어버렸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정지에, 역시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가 말을 건네왔다.
"착한 애는 잘 시간이지?"
이미 잘 시간은 지났다고,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것말고도 묻고 싶은게 많았다. 왜 여기로 왔는지, 왜 상처입고 있는지, 어디로 가려는건지. 하지만 낮으면서도 머릿 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무슨 힘을 쓰고 있는 걸까. 그가 누군가 찾는것처럼 주변을 살펴보다 다시 담쪽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릴 때까지, 아이는 멀거니 서있기만 했다.
"아, 피...."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방금 본 것이 꿈속의 일이었던 것처럼, 모든 소리는 그치고 눈만이 내리고 있었다. 빨갛게 번졌던 눈은 다시 흰 색으로 덮여간다. 누이는 아직도 잠을 자는 모양이다. 마루에 앉은 채, 아이는 피의 색이 모두 덮일 때까지 겨울의 긴밤을 지새웠다.
"그런가.. 네놈도 은발 머리였군."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앞의 사람을 잡아끌려들었다. 안전모를 벗자 드러난 은발머리에 부장은 적잖게 놀랐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 사람도 은발머리다. 눈처럼 하얀색, 유달리 더운 날의 햇빛을 쬐어 환한, 그때와 같은 색이다.
"그럼, 난 일있으니까."
"........가버렸는데요."
"저자식!고작 3~4주만에 사람을 새까맣게 까먹어?"
"아뇨, 보통 사람 같으면 까먹고도 남을 걸요?"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버린 뒷모습이 사라질때까지 보고 있었다. 말하면서도 참 모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10년도 더 된 사람같은건 까먹었어야 하고, 까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못했다. 그 광경은 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소고, 칼 좀 줘봐라."
그 사람일리 없다고, 그런 기막힌 우연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번, 자신의 눈을 그의 얼굴에서 찾았을 때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눈 위에서 사람이 아닌양 행세하고 있던 그 꼴이, 겨울이 한참 지난 날에 다시 나타났다. 그 땐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도 엄연한 사람이었다.
지붕으로 올라간 히지카타가 그에게 칼을 건네고 맞부딪힌다. 그의 어깨가 베이고, 칼집에서 칼을 빼어들어 무식한 부장의 검을 깨부순다. 그 일련의 동작들을 같은 높이에서 보고 있었다. 만날 때마다 상처를 입고 있는 걸까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곁에 서있던 곤도가 뭐가 그리 재밌냐며 핀잔을 했다. 아뇨, 이거 꽤 재미있어요. 진선조에서는 무섭다고 여겨질, 천진한 웃음을 그리며 이제는 소년이 되어버린 아이가 즐거워했다.
"저도 한판, 붙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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