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세상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반쯤 열어두었던 베란다를 통해 비냄새가 났고 막 일어나 갠 이불은 기분 탓인지 눅눅하게 느껴졌다. 이런 날씨여서야 미뤄두었던 빨래는 처리할 수가 없다. 한숨을 뱉으며 대충 세안을 한 뒤 베란다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대부분 딱 두 가지의 선택지가 존재하는 법이었다. 갑작스레 혈중알콜농도의 결핍을 느껴 나간다든지, 몸이 확 쳐져 의욕을 모두 잃고 집에 박혀있는다든지.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전자의 경우였으나 이유가 조금 달랐다. 최근 개봉했다는 영화를 며칠 전부터 알아봤었기 때문이다. [애니벨]. 제목부터 맘에 들었다. 상영 페이지에 들어가 평점과 대략적인 스토리, 몇 개의 리뷰까지 꼼꼼히 읽어두었던 참이다. 비 오는 날엔 역시 공포영화지! 영화 시간표를 빠르게 체크해 시간대를 메모해둔 후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오늘 몇 시에 ㅂㅗ는 게 좋겠나!!]
보내고 나니 오타가 났지만 심한 것도 아니니까. 자켓 주머니에 쓸만한 정도의 돈을 챙기고 바지를 갈아입었다. 생각같아선 필살 번쩍 바지를 입고 싶었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훼손될 위험성이 있었다. 내심 아쉬워하는데 우웅,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좁은 공간을 뛰어 달려들듯 해 폰을 움켜쥐었다.
[쿠소마츠]
[미쳤다고 이 날씨에 영화를 보러 가냐]
[혼자 보든지 해]
"..흐윽. 이치마츠..."
이 답장이 아닌데. 죽상이 된 카라마츠가 다리를 모으고 쪼그려 앉아 답장을 뚫어지게 보았다. 본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내용이다. 결국 눈물을 머금은 채 전화번호부를 샅샅히 뒤져 마구잡이로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카라마츠. 나 지금 누구 손좀 봐줘야 해서 바빠.]
[가겠냐!!젠장 비 더 많이 오잖아!!]
[이런 날에 공포 영화라니 취약 고약하쌈바]
[야구ㅜ? 오늘은 안해에ㅔ~~]
[응? 설마 영화 같이 볼 사람 없는거야?]
.....틀렸다. 전부 안될 멤버들이야. 좌절감에 중얼거리며 카라마츠가 휴대폰을 뒤집었다. 보고 싶은데, 진짜 혼자 보기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오늘은 평일 오전. 사람이 많을 거란 긍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라도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혹시 혹시라도 나 혼자밖에 없다고 한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넓고 어두컴컴한 공간에 빨간색 의자만이 가득하고 앉아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뻘쭘한 팝콘과 콜라를 제 자리에 놓고 적막 속에 오도카니 남겨져 있는 마츠노 카라마츠..! 불안해하면서 영화 광고와 별로 사고 싶지 않은 상품의 홍보 영상을 넘기고 나면 긴장으로 손이 흠뻑 젖어있을 것이다. 음산한 공포 영화 특유의 사운드가 깔리며 프롤로그가 나온 후 타이틀이 까맣게 걸리고 나면 아마 심장이 멈춰있지 않을까. 영화의 주인공은 이미 미야가 아니라 카라마츠로 바뀌어 퀭한 눈을 하고 기괴한 화장으로 얼룩진 애니벨이 스크린을 찢고 나올 것만 같다.
아냐, 이런 상상은 좋지 않다. 그래도 의외로 사람들이 보러 올 수도 있고, 그 옆 좌석을 예약하면 되는거다. 굳게 마음먹은 카라마츠는 퍽 비장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비장하니까 신발은 워커로.
밖을 나오니 생각보다 빗줄기가 굵었다. 까만 장우산을 펼치니 총알처럼 달겨드는 빗소리가 과격하다. 역시 괜히 나왔나, 했을땐 이미 지하철역 앞이었다. 계단으로 걸어내려가는 카라마츠의 옆으로 쏜살같이 누군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망했다! 같은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우산을 안 가져온 모양인지 빨간 후드티가 흠뻑 젖은 채 역 안으로 피신하는 걸음이 바빴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우산을 안 챙기다니, 칠칠맞은 BOY로군. 카라마츠는 여유롭게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탔다.
시간대가 시간대이니만큼 사람은 몇 없었다. 싸한 공기에 재킷을 꼭 여미며 가운데 나 있는 자리를 선택해 앉았다. 우산을 정리하며 등을 벽에 꼭 붙이는데 어쩐지 엄청나게 축축한 냄새가 난다.
"에..."
무심코 의아함을 뱉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의 빨간 후드가 보인다. 그것도 다 젖어서 완전 짙은 색. 젖은 걸...아니, 젖은 수건의 냄새가 확 풍겼다. 소리가 들렸는지 곁눈질하던 눈이 그 사람과 마주쳤다. '뭐니 이 뻘쭘한 상황!!!' 머릿속에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에..에..에취."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되도 않는 재채기를 했다. 눈치챘나? 자연스러웠겠지? 혼자만의 고민에 잔뜩 몰입되어 있자 옆에서 푸큽!하고 사래라도 걸린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거기에다 대고 목에 뭐가 걸린 모양이지, 하고 넘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얼른 도착했으면. 덜컹거리는 흔들림을 느끼며 역 이름이 뜬 전광판만 노려봤다.
다행히 먼 거리는 아니어서 금방 역에 도착했다. 역 이름이 보이자마자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튀어나가 문 앞에서 대기했다. 뒤에서 이쪽을 보는 시선이 등을 뚫고 보이는 것만 같다. 분명히 비웃고 있겠지. 아무렇지 않은 척 코트 깃을 정리하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발을 떼고 성큼성큼 걸었다. 어디를 가도 빨간 시선이 따라붙는 착각, 자의식 과잉일지도.
매표소 안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데도 영화를 보러 시내까지 나오다니 커플들의 힘이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주머니 안으로 쑥 넣어 감추며 척척 걸어갔다. '바로 들어가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상냥한 목소리가 안내한다. 문제 없다고 답하고 좌석 배치도를 살폈다. 다른 영화에 비해 사람이 드문드문 있지만 그래도 일단 혼자는 아님. 이것으로 최악의 경우 1은 면한 셈이다. 그럼 옆에 앉을 사람은? 척 봐도 둘씩 자리가 있는 것이 커플의 향연이었다.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그 옆에 앉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공포영화를 혼자 보러 오는 사람이 있긴 있는가?
"...있잖아?!"
"네? 무슨 말씀.."
"아니아니 아닙니다!"
딱 중간 즈음, 텅 빈 좌석의 열 한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누군가가 있었다. 에, 엄청난 마이페이스.. 그러면서도 제 손가락은 그 옆자리를 터치했다. 예에쁜 카라마츠 girl이면 좋겠다!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지만 기분 나쁜 아저씨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다. 요는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함으로써 공포가 덜어지는 효과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티켓을 쥔 카라마츠는 손목에 찬 메탈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미디움 사이즈의 콜라와 나쵸칩을 샀다. 바로 앞의 커플이 들어가고 혼자 표를 확인받는 것은 보통 사람 입장에서 꽤 어색한 경험일지 모르나, 카라마츠에게는 제 옆자리에 앉을 사람의 생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혹은 빨리 들어가서 맛있는 나쵸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나.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이따금씩 속살거리는 남녀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그러니까, I열, 15번..., 중얼거리며 깜깜한 공간 속을 밝히는 번호들을 따라간다. 휭하니 빈 좌석들은 몇 없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good한 상태군. 만족스럽게 자리를 잡으며 콜라를 놓자 바로 커다란 스크린이 밝아졌다. 스크린 속 통통한 캐릭터들이 난리법석을 떨며 침묵을 깨자 기분이 한결 안정된다. 그리고 주변을 서성거리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라?"
의아한 듯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카라마츠는 아무렇지 않게 다소 뻔뻔한 태도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이상하네, 분명 나밖에 없었는데 말이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 서 있던 사람은 이내 자리를 툭툭 털고 털썩 앉았다. 턱 하니 콜라를 놓은 옆 자리에서는 고소한 팝콘 냄새가 솔솔 난다. 나쵸도 좋지만 역시 팝콘을 살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마음 속에서 고개를 쳐들 즈음, 카라마츠는 흘끗거리며 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본다. 캄캄한 시야 속 남자라는 것 외에는 구별이 가지 않아 애를 쓰고 있는데 일순 스크린 안에서 불꽃이 터지며 화악 빛이 쏟아졌다. 어라, 빨간, 후드.......
시선이 또 마주친 것은 기분 탓이었을 테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음산한 분위기의 광고가 나오고 있다. 진퇴양난. 떡하니 떠오른 단어만큼 적절한 말은 없었다. 딸치다 걸린 것 만큼 어색한 상황이었다. 아냐, 저 쪽에선 날 못봤을테니까, 끝까지 모른 척하면.......
"오, 아까 봤었죠? 지하철에서."
"...봤어어?!!"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러버린 카라마츠가 그 다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런, 완전히 발각이다. 히힛 웃는 모양새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코 밑을 문질문질하며 친근한 척 하는 게 누가 보면 10년지기 동네 친구라도 만난 모양새다. 순간 귀중한 나쵸를 떨어뜨릴 뻔 해 허둥지둥 받쳐 품에 안은 카라마츠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저기, 아까 그.. 후드...아니, 이건 정말이지 우연..."
"이야아, 또 만날 줄 몰랐다고?그... 에..에..에취."
완전 놀리네! 카라마츠의 표정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아까까지 유지하고 있던 미묘한 긴장이 확 놓여 고개를 홱 돌렸다. 계속 옆에서 조잘대는 게 사정없이 귀에 꽂혔지만 그냥 흘리기로 한다. 빨간 후드의 페이스에 휘말리기도 전에 영화가 시작한 것은 행운이었다.
음울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로 시작된 [애니벨]에 카라마츠가 침을 꿀꺽, 소리가 나게 삼켰다. 과연 전작 [컨지링]의 속편에 걸맞는 영화, 초반부부터 심상치 않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쵸를 우적우적 씹으며 콜라를 쭉쭉 들이켰다. 왜 저렇게 무섭게 생긴 인형을 집에 들이는 것인가! 진심으로 궁금해할 때였다.
"아아, 엄청 먹어대네... 저기, 그렇게 먹어대면 시끄럽잖~"
"..에?"
카라마츠가 옆을 돌아본 순간, 드르르륵! 재봉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헉! 바로 컵을 꽈악 쥐며 카라마츠가 몸을 움츠렸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미야가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나오는 티비에 시선을 뺏긴 채 작업을 하고 있다.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고개를 돌려보면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보는둥마는둥 하다 이쪽을 쳐다본다. 안 무섭나? 저러다가 찔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없는거야?!
눈이 마주친 채 빨간 후드가 히ㅡ하고 씨익 웃었다. 에. 어쩐지 바보가 되버린 느낌이 들었다. 미야는 재봉틀 바늘에 찔리지 않았다. 스크린은 다시 평화로운 낮 시간을 비춘다.
"많이 무서운가봐? 가죽재킷 씨."
예민해진 미야가 남편에게 호소를 하고 있다. 제발, 이사 가자. 이 집 정말 이상해! 소리치는 말들이 전부 다른 차원의 말처럼 흐려져간다.
"가죽재킷이 아니라, 카라마츠다.."
"그래? 난 오소마츠."
건들거리는 폼이 영 산만하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오, 그 나쵸 맛있어 보인다, 하나만. 하며 쏙 집어간다. ...하나가 아니잖아?! 가득 집어 소스까지 듬뿍 찍어가는 뻔뻔함이 기가 막힌다. 카라마츠는 벙쪄있다가 전투적으로 팝콘 봉투로 손을 뻗어 한움큼 쥐었다. 마구 입에다 갖다 넣고 씹자 바로 L사이즈도 아닌데 뺏어먹는 법은 없다며 반격해온다. 영화를 보러 온 건 맞는지, 다시 봤을 때는 이미 사건 하나가 휙 지나간 후였다. 이래서는 기껏 혼자 보러 온 보람이 없었다. 오소마츠인지 뭔지 때문에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투덜거리는 말소리에 다른 말이 섞여온다. 우와, 이 사람 완전 남탓하고 있어요. 어차피 영화 제대로 못 보는 주제에. 아무리봐도 오소마츠의 목소리다. 진짜 한 대 때릴까, 하고 주먹을 쥔 순간이었다.
미야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는다. 흐느끼며 부술 듯 버튼을 콱콱 누르는 손길이 긴박했다. 엘리베이터 너머의 새까만 어둠이 공포 그 자체였다. 비명을 지르며 미야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달려들었다. 비상구를 통해 계단을 정신없이 올랐다. 카라마츠는 자신이 달리는 듯한 기분이 되어 무릎을 달달 떨어댔다. 몇 개 남지 않은 나쵸의 곽을 찌부러지게 쥐었다. 어둠보다 까만 물체가 미야를 쫓고 있었다. 기어올라올지도 몰라. 머릿 속이 공포로 가득해 옆의 팔걸이를 턱 잡았다.
그리고 그 손위를 누군가의 손이 덮었다. 어? 정신없이 떨어대던 카라마츠가 얼음처럼 굳었다.
"귀신인 줄 알았어? 오소마츠지롱~"
"이...!"
진짜로 한 대 치려는 순간, 찢어지는 소리를 지르며 천장에서 악령이 아가리를 쩌억 하니 벌렸다. 으아아! 카라마츠는 드디어 나쵸 곽을 집어던지며 오소마츠에게로 달려들었다. 어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오소마츠가 반사적으로 카라마츠를 안는 꼴이 되었다. 정말로 놀랐는지 헐떡이는 숨소리까지 들렸다. 왠지 동생처럼 느껴져서,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주었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영화나 볼까하고 혼자 온 건데, 이상한 사람을 떠맡았네.
머쓱하니 볼을 한 번 긁적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마츠라, 이름도 비슷한데 성격은 정말 겁쟁이에 이상한 녀석이다.
"그래, 다 울었어? 자켓?"
"큽.... 자켓, 이 아니고..카라마츠.."
"네네, 카라마츠. 정~말 겁 많네."
"내가 겁이 많은게 아냐! 영화가 너무 무섭지 않은가!"
"그정도로 무서운 건 아니잖.. 그보다 너 말투 되게 이상하네. "
"에? 말투?"
"음..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안쓰러워!"
"...안쓰러워? 무슨 말인가?"
"아니아니, 신경쓰지마."
그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재밌는데, 이 횽아 번호 딸래?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오소마츠가 폰을 휘휘 흔들어보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애나벨 엘베 씬이 정말 무서웠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씀
쌍둥이 x. 다들 친구. 오소송이랑 카라송은 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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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