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다나] GO BACK

2014. 11. 11. 21:06

그건 지극히 평범한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날씨가 좋았고, 귀능은 빨래가 잘 마르겠다며 뀨뀨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이상한 웃음소리에 대한 서장님의 핀잔을 기다렸다. 1,2,3..., 폭발 카운트다운을 하듯 숫자를 세던 그는 묘한 기운을 느끼고 멈췄다. 상대에게선 그 어느 시선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에 열중하는가 싶어 힐끔 훔쳐보면, 메두사가 말했던 감정조절장애라도 걸린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죄없는 서류만 꾸깃꾸깃 구겨졌다. 뀨잉, 무슨일인지 알 턱이 없는 귀능이 다가오자, 다나는 멍하니 있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반응, 몹시 수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일 때문이 아니라고, 동물적 직감이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장이 껌뻑죽는 오수씨라면 더더욱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최근엔 잡지니 뭐니 읽는다면서 틀어박혀있으니까.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본 결과.

 

 

 

 

 

나가군...’

 

 

 

 

 

사고쳤군요. 귀능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난감했다. 현직 비서로서 그의 상담을 들어주었던터라, 알고 있었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적어도 졸업할 때까진 입닫고 있겠거니 했었는데..., 학생에게는 어른의 고작 몇 달이 군대에서 보내는 2년만큼 길고 답답하게 느껴지는가보다. 알고 있었던 귀능도 뒤통수를 맞은 격인데 다나는 오죽할까.

오늘 스타일이 좋으시네요따위의 말처럼 아무 사심없이 하는 말은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나이프와 제일 격하게 대립했을 때 나가가 멋있어서 반할 거 같아요라고 했었던 것 같지만 대충 넘겼었다. 그는 다나를 많이 의지했다.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건 다나가 금강불괴의 특기를 가졌고 나가의 안정제처럼 그의 정신을 잡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다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누가 무슨 바람이라도 불어넣었나. 쌓여가는 업무량과는 반비례로 그녀는 축 처져갔다.

언제부터인가 나가는 꼴에 성장기라고 키가 좀 컸다. 그만큼 숙련도도 늘어 이제는 신참이라며 놀릴 수 없게 됐다. 더 많은 실전에 투입되었고, 기본적으로는 서포트 포지션이었지만 되려 나서게되는 일이 많았다. 명실상부 최강인 그의 타고난 초능력 탓이다. 그만큼 다나의 특기도 무시할 수 없었으나 약점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인력부족을 핑계삼아 비는 손을 낚아가는 서장의 손에 많이 잡힌건 우연히도 나가의 경우가 많았으며, 서장이 햇병아리 수준을 갓 탈피한 그에게 구해지는 일 또한 많았다. 어제도 그런 반복된 날들 중 하루일 뿐이었다.

무너져가는 폐허의 건물, 한몫하게 생긴 깡패들에게 정도가 지나치게 두드려맞았던 다나. 파트를 나누어 맡아야했던 작전. 이상하게 그날은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다. 다나가 딱 제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로 맞았을 때 막혔던 벽이 간단히 뚫렸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나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유달리 불안정한 그의 특기에 터뜨리지 마라, 고 한마디하고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시 몸을 쉬었다는 걸 몰랐는지, 그 후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어차피 철거할 건물이라 물어낼 건 없었지만 눈을 떴을 땐 다른 의미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끝낸 건지 나가가 다가와 몸을 붙여왔다. 부축하려는 그에게 기대어 일어나자 몸이 휘청였다.

 

 

 

 

거하게 했네.

 

 

 

 

 

어쩌다보니...

 

 

 

 

 

쑥쓰럽게 머리를 긁적이자 다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 난리를 쳐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녀석뿐일거다. 걸음을 맞추어가며 고개를 들자, 영락없는 새벽의 하늘이 보였다. 내일이 휴일이라 망정이지 엄연한 노동착취다. 아직 비는 그치지 않고 부슬부슬 뿌려져 천천히 말라가는 옷을 적셔왔다. 통증에 가려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몸이 눅눅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발을 헛디딘 건지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

 

 

 

 

조심해요.. , 못 걷겠어요?

 

 

 

 

자연스럽게 받쳐든 자세에 다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몸을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아들자 더 기겁했다. 지금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날..,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날따라 몸은 제 것이 아닌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어요. 부축해도 못 걸으실걸요.

 

 

 

 

아니면 업어드릴까요? 그 악의없는 물음에 다나는 한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놀리려는 뜻은 조금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업어! 울컥해서 내뱉었으나 나가는 자세를 고쳐 업는 대신 더 든든하게 팔을 받쳐 안았다. 화가 난 건 아니었으나 당황해서인지 주먹질을 해도 영 먹히질 않는다. 안아올려져서일까, 조금 듬직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한게 아니라 절로 생각이 들어차버렸다. 이 타이밍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너 돌아가면 보자.

 

 

 

 

뿌득 이를 가는 다나를 내려다본-그때만큼 나가의 얼굴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생각한적이 없었다-그가 한 말은 죄송합니다, 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좀 봐주세요, 도 아니었고. 그 때의 얼굴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혼란스러움이 배가 되어간다.

 

 

 

 

그냥 안아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

 

 

 

 

 

이상한가? 스스로 묻는 나가를 보며 다나는 알 수 없는 차원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냥 안아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뭐가? 누구를? 나를? 

 

 

 

 

 

. ....,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 안아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겠죠?

 

 

 

 

 

 

 

 

 

 

 

 

 

 

 

 

 

 

 

 

 

 

 

 

젠장, 이게 뭐야..’

 

 

 

 

오후 3, 그 어느때보다 빨래를 말리기 좋은 화창한 날씨. 마하의 속도로 쌓이는 서류는 평소와 같으므로 상관무. 실내 온도는 쾌적. 긴급상황 무.  

 

 

 

그러나 한 사람만은 남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 정도로 사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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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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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싫] 무제

2014. 11. 11. 21:05

 

※나이프나가

 

 

 

 

 

반은 짐승인 몸뚱이는 쓸데없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떠오른 불안감이 머릿속을 잠식해 지끈지끈한 두통에 시달리는중이었다. 확증은 없다. 하지만 일이 터지고 나서는 너무 늦다. 증명할 수 없어도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분명했기에, 사사는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뒤척거리느라 침대는 땀에 젖고 날개의 조각들에 덮여 있었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나가야했다. 이 끝없이 커져만가는 불안함의 근원을 확인해야만 한다. 늘 가까운 곳에 두는 갑갑한 코트를 집어 꿰어입고는 현관 문을 열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폐속까지 들어오는 서늘한 느낌에 헛기침이 나왔다. 추워. 중얼거리며 자연스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사무실이 그리 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날갯짓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까마귀다.

 

 

 

 

 

 

 

 

 

 

 

 

 

 

 

 

 

 

 

"...나가가?"

 

 

 

 

". 아무도 못봤대. 전화도 불통이고.."

 

 

 

 

출근했을 때 보인 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혜나였다. 유난히 곱슬져보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가의 행방을 물으니 나온 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출근시간, 학교 측에서는 보내줬다고 했고, 집에서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으며, 연락은 두절.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나가가 무슨 일이 없고서야 아직까지 안보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기캐'라고까지 불리는 그가 왠만한 것에 당해 빌빌거릴 인물도 아니다. 어리다해도 텔레포트, 염동, 투시까지 높은 수준의 능력을 구사하는 고급 인력이었다. 그런만큼 스푼에서 나가를 뺀다면 꽤나 손해가 컸고, 윗선까지는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지만 서장은 이미 제발로 뛰어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노발대발하는 모습이 눈앞에 있는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사실 위험이라는 단어 자체는 나가와 거리가 멀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석. 그렇기에 사사는 나가가 심한 부상을 입거나 사망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체의 문제보다 염려되는 것은 그의 정신상태였다. 질풍노도의 열여덟, 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나가는 총체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하는 반응들은 평범한 학생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독특했고 이상해서 납득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이호의 일에 휘말려 죽을 뻔한 것을 '짜증나는 '이라고 했을 때의 당혹감은 아직도 생생했다. 수준이 높기 때문에, 능력이 월등하기 때문에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위험한 상황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본인이 그 상황을 안이하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걱정돼. 사사는 최근 들어 고민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혼혈 차별, 귀능의 상처, 나가의 위험.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알코올을 속에 들이부어도 사라지지 않았던 혼란스러움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코트 안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일 없으면 너도 나가 찾는 것좀 도와라.

 

 

 

 

일도 많은데 직원 찾는거까지 하기엔 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사사는 건물을 나오며 한숨을 쉬었다. 하얗게 덩어리지는 입김이 제 걱정같아서, 일부러 따뜻한 숨을 허공에 불어넣어본다. 괜한 생각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복잡한 표정으로 몸을 떠올려, 높은 전봇대에 발을 디디고 섰다 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회색의 머리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거운 짐을 끌고가는 노인이 눈에 띄었을 뿐. 직업병인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젊은 사람이 맘씨도 곱지."

 

 

 

 

꾸벅 인사를 하고 배웅을 한 뒤 시간을 확인했. 이미 저녁이 다 되어 하늘은 짙푸른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겨울의 저녁은 쌀쌀맞고 어둡. 그것을 실감하며 코트자락을 꼭 여미었다.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서장도 찾지 못한 모양이다. 이쪽에서도 허탕만 친 꼴이라, 걱정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정말 납치라도 당한걸까. 혹시 몰라 회사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듣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이야, 여기 있었네?"

 

 

 

 

"...!"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표현할수밖에 없는 목소리가 귓전을 건드려왔다. , 불길함은 이것이었을까. 소리가 나는 곳을 좇아 위를 향하자 보이는 하얀 머리칼, 그리고 그 옆에는.

 

 

 

".........."

 

 

 

 

그렇게 찾았던 회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깨져버렸는지 안경을 쓰지 않은 채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 그를 보고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나가는 사사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로, 하지만 너무 낯설은 목소리로 선배, 라고 속삭여왔다.

 

 

 

 

 

 

 

 

 

 

 

 

 

 

 

 

 

 

 

 

 

 

 

 

 

 

 

 

 

"그래. 또 죽쒀서 개줬다."

 

 

 

 

빠득 이를 갈며 다나는 갈데 없는 분노를 손에 실어 그대로 폰을 아작내버렸다. , 통화는..! 이제 끝났어. 툭 내뱉고는 벗어두었던 겉옷을 걸쳤다. 저도 모르게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한번 경험해봤으면서, 또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이 무뎌진

것은 주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자신도 그 촉을 세우고 있지 않았던 거다. 어이없을 정도로 순간에 일어난 배신에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계집애처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전 스푼의 직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생각난 것..., 제길. 진짜 환장하겠네. 편의점을 들러잡히는대로 사 봉투에 우겨넣은 뒤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길을 찾아 그의 집을 들렀다.  

정신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쯤은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 노크랍시고 문을 두들겨대자, 특기가 십분 발휘되어 단단한 철문이 쪼그라들었다. 거의 문을 부숴버리고 틈으로 진입한 다나는 바로 집안의 무거운 공기를 느꼈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 땅을 뚫고 들어갈 것 같은 암울함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정리 되지 않은 좁은 방의 구석,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앉아있던 사사가 퀭한 얼굴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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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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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긴] 무제

2014. 11. 11. 21:04

차가운 눈송이가 밤새 내리면, 어느새 더럽고 추한 몰골들은 전부 새하얗게 덮여있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추운 곳에 내리는 결정의 덩어리가 아닌 정화의 의미였다. 적어도 전쟁터에 있는 이들만은 그리 생각했다. 딱딱하게 굳은 피와 살점 조각의 비린내마저 전부 덮어버리길, 눈의 색만큼이나 하얀 무사가 빌었다. 눈이 쌓인 둔덕에 올라서서 떨어지는 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밟고 있는 곳이 순수하게 눈으로 쌓인 곳이 아니라 시체들을 덮고 쌓인 곳이라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피는 늘 가까운 곳에 있기 마련이기에, 당연하다는 것처럼 사내에게서 흘러내려서 떨어진다. 깊게 베인 팔의 상처를 부여잡는 것은 이미 버릇이 되었다. 검을 다루는 팔이기에 어느 곳보다도 많이 깎이고 베였다.
눈부실 정도로 하얀 눈을 빨갛게 적셔가는 광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맨발이 아니어도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이 싫지 않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조용히 하얗게 내리는 그 풍경이 어두운 공간을 채웠다. 제 머리색을 닮은 점도, 남자는 퍽 좋아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백야차는 어디냐? 급한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싸움이 끝나도 추격은 끝나지 않는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환히 웃으며 얼굴이 달덩이처럼 하얀 여자는 책을 덮었다. 닳고 헤져 너덜너덜한 것은 여자의 고운 손에 들려있는 게 제 잘못인 것처럼 바닥에 붙었다. 한자로 적힌 제목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벌써..? 더 듣고 싶은데."

 

동그란 머리통을 쑥 내밀고 아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분명, 전쟁통이 아니었다면 절차를 밟고 교육에 들어갔어야 할 쯔음의, 눈망울 안에 하나 이상의 것을 담지 않는 아이. 오래된 이야기라도 그에게는 긴밤을 지새울 수 있을만큼 이색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를 바르게 기르고자 하는 누님은 서둘러 아이를 재우려했다. 아무리 입을 삐죽이고 불평해보아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아이가 자신을 안은채 조르자 별안간 기침을 토해냈다. 괜찮아요? 지병이 있는 친누님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치료를 받아도 또 다시 도지고 덧나는 병. 말하자마자 기침에 섞여나온 피에 아이는 기함했다. 그렇게 말로만 전해 들었던 죽음이라는 게 온걸까 하고 불안해하며 떤다. 죽으면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못하게 된다고 했었다. 그렇게 되는 걸까,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내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쓰다듬는다.

 

"소스를 먹었을 뿐이란다."


"아..."

 

아이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잠들지 못했다. 눈오는날 밤은 너무 조용해서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귓가를 간질였다. 미처 다 듣지 못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뒤척이면, 바로 옆에 누워있는 누이의 흰 얼굴이 자그마한 달빛을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아무 미동이 없는 모습은 가끔 아이를 겁먹게 만들었다. 지금도, 잠시동안이지만 죽음이 누이를 데려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리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눈이 그치기 전까지 그럴것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감에 슬그머니 문쪽으로 발돋움해 이동한 순간이었다.
ㅡ쾅
무게가 제법 있는 것이 떨어진 소리, 우지끈하며 부서져내리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친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이런 시각에 소란스럽게 들어오는 손님은 없다. 분명 도둑일텐데, 아이는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오는 도둑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진짜 도둑이면 어떻게 하지? 아이는 동그란 눈을 굴리다 검술 도장에서 쓰던 목도를 조막만한 손으로 쥐었다. 문에 착 붙은채로 작은 틈을 벌려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요란스럽던 소리가 무안할정도로 사방은 고요해졌다. 잘못 들은 건가? 그렇다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던 감각에 아이는 한차례 몸을 떨고 문을 활짝 열었다. 시선을 똑바로 고정하자 그제야 제대로 보인다.


"...피...!"


걸어간 방향을 알려주듯 길을 따라 떨어져있는 피의 웅덩이에 아이는 몸을 굳혔다가 눈을 비볐다. 다시보아도 그대로 있는 걸 보니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마당은 꽤 넓어서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문채 조심이 한발 딛었다. 그 핏자욱을 따르려고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담쪽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지 못했더라면.


"..........."


"........"


일순, 아이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방울눈을 했다. 피를 흘리며 들어온 도둑은 하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게 칭칭 감고 있지도 않았고, 피부도 누이의 것처럼 빛을 받아 환하다. 마주한 시선의 빛은, 자신의 것과 같은 적빛이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움찔댔다. 긴장으로 인한 것인지, 동질감에 놀라움을 느낀 것인지 알 수 없다. 문득, 누이가 읽어주었던 요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저건 사람이 아니라 요괴일지도 몰라. 설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이가 달싹이던 입술을 벌리자, 하얀 사람은 쉿, 하고 곧게 뻗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저도 모르게 옮기려던 발도, 무언가를 말하려던 입도 동작을 멈추어버렸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정지에, 역시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가 말을 건네왔다.

 

"착한 애는 잘 시간이지?"


  
이미 잘 시간은 지났다고,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것말고도 묻고 싶은게 많았다. 왜 여기로 왔는지, 왜 상처입고 있는지, 어디로 가려는건지. 하지만 낮으면서도 머릿 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무슨 힘을 쓰고 있는 걸까. 그가 누군가 찾는것처럼 주변을 살펴보다 다시 담쪽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릴 때까지, 아이는 멀거니 서있기만 했다.

 


"아, 피...."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방금 본 것이 꿈속의 일이었던 것처럼, 모든 소리는 그치고 눈만이 내리고 있었다. 빨갛게 번졌던 눈은 다시 흰 색으로 덮여간다. 누이는 아직도 잠을 자는 모양이다. 마루에 앉은 채, 아이는 피의 색이 모두 덮일 때까지 겨울의 긴밤을 지새웠다.

 

 

 

 

 

 

 

"그런가.. 네놈도 은발 머리였군."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앞의 사람을 잡아끌려들었다. 안전모를 벗자 드러난 은발머리에 부장은 적잖게 놀랐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 사람도 은발머리다. 눈처럼 하얀색, 유달리 더운 날의 햇빛을 쬐어 환한, 그때와 같은 색이다.

 


"그럼, 난 일있으니까."

 

"........가버렸는데요."

 

"저자식!고작 3~4주만에 사람을 새까맣게 까먹어?"

 

"아뇨, 보통 사람 같으면 까먹고도 남을 걸요?"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버린 뒷모습이 사라질때까지 보고 있었다. 말하면서도 참 모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10년도 더 된 사람같은건 까먹었어야 하고, 까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못했다. 그 광경은 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소고, 칼 좀 줘봐라."


그 사람일리 없다고, 그런 기막힌 우연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번, 자신의 눈을 그의 얼굴에서 찾았을 때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눈 위에서 사람이 아닌양 행세하고 있던 그 꼴이, 겨울이 한참 지난 날에 다시 나타났다. 그 땐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도 엄연한 사람이었다.
지붕으로 올라간 히지카타가 그에게 칼을 건네고 맞부딪힌다. 그의 어깨가 베이고, 칼집에서 칼을 빼어들어 무식한 부장의 검을 깨부순다. 그 일련의 동작들을 같은 높이에서 보고 있었다. 만날 때마다 상처를 입고 있는 걸까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곁에 서있던 곤도가 뭐가 그리 재밌냐며 핀잔을 했다. 아뇨, 이거 꽤 재미있어요. 진선조에서는 무섭다고 여겨질, 천진한 웃음을 그리며 이제는 소년이 되어버린 아이가 즐거워했다.


"저도 한판, 붙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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