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지극히 평범한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날씨가 좋았고, 귀능은 빨래가 잘 마르겠다며 뀨뀨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이상한 웃음소리에 대한 서장님의 핀잔을 기다렸다. 1,2,3..., 폭발 카운트다운을 하듯 숫자를 세던 그는 묘한 기운을 느끼고 멈췄다. 상대에게선 그 어느 시선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에 열중하는가 싶어 힐끔 훔쳐보면, 메두사가 말했던 감정조절장애라도 걸린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죄없는 서류만 꾸깃꾸깃 구겨졌다. 뀨잉, 무슨일인지 알 턱이 없는 귀능이 다가오자, 다나는 멍하니 있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반응, 몹시 수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일 때문이 아니라고, 동물적 직감이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장이 껌뻑죽는 오수씨’라면 더더욱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최근엔 잡지니 뭐니 읽는다면서 틀어박혀있으니까.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본 결과.
‘나가군...’
사고쳤군요. 귀능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난감했다. 현직 비서로서 그의 상담을 들어주었던터라, 알고 있었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적어도 졸업할 때까진 입닫고 있겠거니 했었는데..., 학생에게는 어른의 고작 몇 달이 군대에서 보내는 2년만큼 길고 답답하게 느껴지는가보다. 알고 있었던 귀능도 뒤통수를 맞은 격인데 다나는 오죽할까.
‘오늘 스타일이 좋으시네요’ 따위의 말처럼 아무 사심없이 하는 말은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나이프와 제일 격하게 대립했을 때 나가가 ‘멋있어서 반할 거 같아요’라고 했었던 것 같지만 대충 넘겼었다. 그는 다나를 많이 의지했다.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건 다나가 금강불괴의 특기를 가졌고 나가의 안정제처럼 그의 정신을 잡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다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누가 무슨 바람이라도 불어넣었나. 쌓여가는 업무량과는 반비례로 그녀는 축 처져갔다.
언제부터인가 나가는 꼴에 성장기라고 키가 좀 컸다. 그만큼 숙련도도 늘어 이제는 신참이라며 놀릴 수 없게 됐다. 더 많은 실전에 투입되었고, 기본적으로는 서포트 포지션이었지만 되려 나서게되는 일이 많았다. 명실상부 최강인 그의 타고난 초능력 탓이다. 그만큼 다나의 특기도 무시할 수 없었으나 약점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인력부족을 핑계삼아 비는 손을 낚아가는 서장의 손에 많이 잡힌건 우연히도 나가의 경우가 많았으며, 서장이 햇병아리 수준을 갓 탈피한 그에게 구해지는 일 또한 많았다. 어제도 그런 반복된 날들 중 하루일 뿐이었다.
무너져가는 폐허의 건물, 한몫하게 생긴 깡패들에게 정도가 지나치게 두드려맞았던 다나. 파트를 나누어 맡아야했던 작전. 이상하게 그날은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다. 다나가 딱 제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로 맞았을 때 막혔던 벽이 간단히 뚫렸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나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유달리 불안정한 그의 특기에 터뜨리지 마라, 고 한마디하고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시 몸을 쉬었다는 걸 몰랐는지, 그 후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어차피 철거할 건물이라 물어낼 건 없었지만 눈을 떴을 땐 다른 의미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끝낸 건지 나가가 다가와 몸을 붙여왔다. 부축하려는 그에게 기대어 일어나자 몸이 휘청였다.
「거하게 했네.」
「어쩌다보니...」
쑥쓰럽게 머리를 긁적이자 다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 난리를 쳐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녀석뿐일거다. 걸음을 맞추어가며 고개를 들자, 영락없는 새벽의 하늘이 보였다. 내일이 휴일이라 망정이지 엄연한 노동착취다. 아직 비는 그치지 않고 부슬부슬 뿌려져 천천히 말라가는 옷을 적셔왔다. 통증에 가려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몸이 눅눅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발을 헛디딘 건지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아.」
「조심해요.. 아, 못 걷겠어요?」
자연스럽게 받쳐든 자세에 다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몸을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아들자 더 기겁했다. 지금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날..,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날따라 몸은 제 것이 아닌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어요. 부축해도 못 걸으실걸요.」
아니면 업어드릴까요? 그 악의없는 물음에 다나는 한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놀리려는 뜻은 조금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업어! 울컥해서 내뱉었으나 나가는 자세를 고쳐 업는 대신 더 든든하게 팔을 받쳐 안았다. 화가 난 건 아니었으나 당황해서인지 주먹질을 해도 영 먹히질 않는다. 안아올려져서일까, 조금 듬직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한게 아니라 절로 생각이 들어차버렸다. 이 타이밍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너 돌아가면 보자.」
뿌득 이를 가는 다나를 내려다본-그때만큼 나가의 얼굴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생각한적이 없었다-그가 한 말은 죄송합니다, 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좀 봐주세요, 도 아니었고. 그 때의 얼굴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혼란스러움이 배가 되어간다.
「그냥 안아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뭐?」
이상한가? 스스로 묻는 나가를 보며 다나는 알 수 없는 차원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냥 안아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뭐가? 누구를? 나를?
「앗. ....,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 안아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겠죠?」
‘젠장, 이게 뭐야..’
오후 3시, 그 어느때보다 빨래를 말리기 좋은 화창한 날씨. 마하의 속도로 쌓이는 서류는 평소와 같으므로 상관무. 실내 온도는 쾌적. 긴급상황 무.
그러나 한 사람만은 남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 정도로 사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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