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캐붕이 좋다
또르륵
나는 남자다.
신파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자 한자 또렷히 안에 새겼다.
나는 절대 불변 영원 어엿한 남성이다.
당연히 바뀌지 않을 명제를 거듭하는 모습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누군가 신파치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쉰내가 나는 다시마를 오독오독 씹으며 보란 듯이 비웃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 이건 카구라지. 신파치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장황한 생각들로 가슴이 부푼다. 전부 내쉬며 밖으로 몰아내었다.
드르륵.
그야말로 기막힌 타이밍에 혼란 유발자가 등장하고 말았다. 흐익. 우스운 소리를 내며 신파치가 기함하자 긴토키는 일순 멈춰있다가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앉아 몸을 뉘었다. 뭔 일 있냐, 신파치. 걱정이라고는 다시마 한 장 만큼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티비를 켜 채널을 돌린다. 이 시간에 뉴스는 없기 때문에 종착지는 고리타분한 드라마다.
그보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자다가 온거야?! 신파치는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부들부들 떨었다. 이 안될 인간 같으니라고, 분명 제가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봉사하지 않는다면 바닥에 말라붙은 죽 찌꺼기만도 못한 삶을 살 놈이다. 저건 진짜배기 쓰레기야. 다리를 쩌억 벌린 채 잠옷을 평상복처럼 입고 나무늘보마냥 뻗어 있는 것이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저 모습이 집에 있을 때 사카타 긴토키의 디폴트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최근 제일 열이 받치는 점은 옷의 구실을 못하는 저 빌어먹을 잠옷이다. 바지는 그렇다쳐도 상의는 헐렁거리며 벌어져 가슴팍이며 쇄골이 훤히 드러나있다. 저것도 옷이라고 입은 거야?! 핀트가 나간 줄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태클을 넣으며 신파치가 속을 부글부글 끓였다. 옷 좀 갈아입으시라구요. 볼멘소리로 던져보지만 대강 하는 대답과 함께 채널만 바뀐다. 싫어요! 앙칼지게 외치는 여자주인공의 목소리가 심히 불편하게 들렸다. 무슨 타이밍인데 이거?
결국 또 혼자서만 극도로 예민해지는 시간이 온다. 신파치가 가장 싫어하는 때이기도 했다. 원래는 없던 것이었으나 돌연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변화.
자꾸만 저 완폐아를 보면 몸이 주체를 못하고 찌르르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혹 병에 걸렸는가 싶어 병원에 가보기도 했다. '제가 저희 집 아...가 아니고, 어떤 사람을 보면 몸이 떨리기도 하고 제 의지와 상관없이 박동수가 빨라지거나 하는데요. 그...조금 몸이.. 열이 나는 거 같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사람의 옷차림이 신경쓰이고....' 의사는 신파치가 말을 다 잇기 전 경멸하는 기색이 역력한 채 말했다. '발정기입니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망으로 가득한 부르짖음을 반복하기를 여러 날, 그럼에도 심해져만 가는 증상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확실하게 '발정기'라는 팻말을 달아주었다. 마침 신파치의 나이는 질풍노도의 그 시기와 딱 들어맞았다. 만약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내게 이런 시련을 줘도 된다고 생각할까? 여전히 시선을 긴토키의 몸에 꽂은 채 신파치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본인은 전혀 자각이 없다. 그래서 더 신파치는 둔하게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저 느슨하고 멍한 인간의 행색이란 실로 파볼수록 반전스러웠다.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창으로 비치는 햇빛에 번쩍거리는 은발과 그만치 하얀 피부였다. 쟁쟁한 빛에 이마 위로 손을 올리며 그늘을 만들던 신파치가 우연찮게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왜 저렇게 하얗지.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뱉었다. 긴토키는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엉? 뭐라고? 따위의 말을 지껄였으나 신파치는 일순 호흡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카구라와 같은 야토족도 아닌데, 저 인간 살색이 어떻게 된 거래?
경악에 가까웠던 그 발견은 결국 조명빨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마무리지었지만, 조명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긴토키는 체격도 몸매도 완폐아의 것이라기엔 월등히 좋은 편이다. 따로 관리도 받지 않는데. 도장에서 웃통을 벗고 내지르기를 할 때마다 보게 되는 제 빈약한 몸매가 억울할 정도다. 아, 생각할수록 열받아. 긴토키는 아저씨스럽게 상의 안으로 손을 넣어 살을 벅벅 긁고 있다. 옷이 마구 흐트러진 채 옷자락이 말려올라가 허리와 배가 드러났지만 제대로 입을 필요를 못 느끼는 모양이다. 신파치는 고개를 홱 돌리고 츠우 사진집을 펼쳐들었다. 사진 속 츠우가 입은 수려한 꽃무늬의 기모노는 기장이 짧아 얇은 허벅지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선을 확 잡아당기는 컨셉임이 틀림없다. 그래야 하는데 왜 자꾸 눈이 돌아가고 난리인가. 완폐아가 옷을 홀딱 벗고 있건 걸치고 있건 상관할 일은 없을 것이다. 보통이라면 그렇지. 신파치가 꿀꺽 침을 삼켰다.
얼굴과 전신이 하얘 꼭 머리부터 발끝까지 잉크를 떨어뜨린 물같았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나른한 눈이 하나의 장치처럼 어울려 시선을 잡아놓는다. 날카로운 콧날 아래로 자리한 적당히 두꺼운 입술이 슬며시 벌어져있다. 굵은 목을 타고 내려가면 살이 깊게 파여 쇄골이 도드라진 모양이다. 상의는 다 늘어져 탄탄한 가슴팍에 둥그런 유륜이 반쯤 드러났다. 누워있는 자세가 둘도 없는 백수꼴이면서도 퇴폐적이다. 긴바지를 입어 가려진 다리 밑 발목과 복숭아뼈가 하얗게 드러난 것마저, 왜. 뭣 때문에.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자 예의 그 졸린 듯한 눈과 마주쳤다.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키며 몸을 굳혔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입을 움직여 신파치, 할 일 없으면 냉장고에서 딸기우유나 가져와라. 하는 목소리에 신파치는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뭔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져올게요!!
쓸데없이 크게 외치고 달음박질해 방을 나왔다. 신파치, 너 거기 화장실...! 뒤에서 들리는 말을 무시하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젠장, 젠장, 저 망할 완폐아.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화장실로 들어간 신파치가 문을 쾅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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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