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성건오]

조각 2014. 12. 20. 12:41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한파가 닥친다는 뉴스를 읽고 인터넷 창을 닫은 뒤 폰을 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영하 12도라고 했던가. 수치로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춥긴 엄청 추웠다. 패딩을 입고 목끝까지 지퍼를 채운 뒤 모자까지 썼음에도 닿아오는 서늘한 감각은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입김을 불어보며 거리 중앙에 세워놓은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올려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얼마나 얄궃고 쓸데없는 단어인지.
대충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자취 생활을 시작한 뒤 맞는 두번째 크리스마스였다. 그런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믿지도 않는 종교의 기념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잘것없는 하루가 변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쳇, 다 지랄이지. 그래도 들뜬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침을 뱉지는 않았다.
딱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운명이란 걸 믿고 싶게 만드는 사람을 만났었던 것이. 이 무식하게 커다란 트리 앞에서 모형 나이프를 떨어뜨렸던 게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물건을 줍고 유심히 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괜히 찔리는 듯한 기분에 꾸물거리다 그거 가짠데요, 하고 말해주었더니 금방 풀어진 얼굴을 했다. 그럼에도 재차 나이프를 쓸어보아 확인하는 모습에서 만난 지 얼마 안된 그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태성입니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이름을 말하는 건 버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씨, 왜이래. 이름을 떠올리자 답답해지는 가슴에 궁시렁대며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돌부스러기를 걷어찼다. 겨우 분간만 갈 정도의 크기인 것이 누구와 많이 닮은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찬란한 트리의 빛보다 새까만 밤하늘이 제 미래 같았고 그만치 먼 것이 꿈인 듯 했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돌아갈까. 주머니 안쪽 깊숙히 구겨넣어둔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부스럭거리다 꺼내서 손에 쥐었다. 저렇게 트리가 밝은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은 라이터를 찾기 위해 다른 손을 뻗어 뒤적일 때였다. 너무 깊숙히 들어갔는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물건 때문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생명과도 같은 담배를 곽 채로 떨어뜨렸다.

...되는 일이 없네.

한숨을 쉬며 몸을 굽히려던 순간 누군가 그것을 먼저 집어들었다. 담배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 들기도 전 익숙한 색의 머리칼이 시선을 잡아챘다. 그 어느 날의 남자와 같은 은발. 어, 바보 같은 소릴 내면서 멍하니 보고만 있자 곽을 툭툭 털더니 내민다. 정면으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하시군요."


변함이 없는 얼굴이었다. 1년이 넘었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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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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