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은 건조한 공기로 가득했다.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에 얕은 기침을 뱉으며 한쪽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발을 딛었다. 발바닥에 닿아오는 나무의 느낌에 안도하며 어색하게 다른 편의 다리를 뻗어 똑바로 섰다. 단단히 땅에 붙어있는 감각. 그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좁은 보폭으로 걷기 시작한다.
앞을 향한 손으로 사물을 더듬으며 전진하는 것은 상당히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발적으로 머릿속을 덮쳐오기에 걸음 하나하나 긴장이 실린다. 여느 장소보다 익숙한 곳인데도 낯설기 그지없어 금방이라도 구덩이에 발이 빠지거나 돌출된 사물에 부딪힐 것만 같은 예감의 연속이다. 현관문까지의 거리는 몇 발자국 되지 않았건만 지구의 반대편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느린 마중에 답답할만 한데도 문 뒤의 상대는 참을성있게 기다려주었다.
밖은 작년과는 다른 강추위로 영하까지 내려간 탓에 현관문 가장자리부터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들로 젖어 있다. 손을 대자 축축한 물이 느껴져 화들짝 떼어내고 손가락끼리 비비적거렸다. 찝찝한 채로 차가운 손잡이를 잡고 돌려 문을 열었다. 쌀쌀한 공기가 화악 끼쳐와 닭살이 돋았다. 보이지 않는 시선이 똑바로 안을 향해온다.
아무것도 안 사와도 충분하다고 했었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또 손에 잔뜩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울은 대충 앞에 고개를 꽂았다가 몸을 돌려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또 뭘 사온거야, 키드. 빠르게 안으로 걸음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느릿한 동작이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팔을 잡아챈다. 소울이 몸을 외로 틀며 어색한 얼굴을 했다.
"..안 도와줘도 된다고."
가볍게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 같은. 소울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마주 보고 있다. 직접 눈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짧은 호흡이 섞이고, 키드가 물러나며 팔짱을 끼듯 지지했다. 무리하는 건 좋지 않아. 꿰뚫어보는 말에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기댔다. 비닐이 구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팔을 붙들어오는 힘은 전보다 세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도 착각일까, 소울은 온통 새까만 공간 안에서 생각한다.
소파에 소울을 앉히고 나서야 팔을 푼 키드가 테이블 위에 가지고 온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매번 비슷하게 가져오니 아마 저번과 같을 것이다. 상비약, 먹을거리, 필요하다고 했던 것. 먼저 소울이 무언가를 요구한 일은 없지만, 키드는 꾸준하게 필요를 추궁했다. 끈질긴 그 성격은 결국 답을 얻어내고서야 현관을 나섰다.
처음은 아마도 새 칫솔과 같은 잡다한 물건이었다. 비누곽, 새 헤어밴드, 머그컵. 점점 늘어나는 주문에도 키드는 별말 없이 목록을 만들어 착실히 배달해주었다. 그런 배려가 더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지금의 나는 그저 짐일 뿐이야. 툭 얹힌 말이 모난 돌처럼 속안에 자리를 잡았다. 숨을 쉴 때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굴러다녀서 가끔은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시야를 잃은 뒤로 몇 주나 되는 시간이 흘렀다. 정확한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다며 불의의 사고라 일축했지만 키드가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절대 부상을 당할 리 없는 전투에서 두 눈을 잃은 경위를 모두가 애타게 물어왔다. 소울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집에 틀어박혀 일체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리고 키드가 찾아왔다.
그 아이는 괜찮아.
그의 첫마디였다.
그런데 소울, 너는 어떻지? 뒤이어 꺼낸 말에 소울은 대답을 망설였다. 어느 쪽도 괜찮지 않았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장 생활하기 불편하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캄캄한 어둠에 갇혀서, 두 번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고, 소울은 아무도 없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홀로 울컥 감정을 터뜨렸다. 이제 가야 할 곳은 어디에 있지? 키드가 오기 전까지 최소한의 활동만 하며 단 한번도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키드."
그가 오기 전까지 누워있던 그대로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소울이 작게 입을 열었다. 키드는 포장을 뜯다 말고 멈춘 뒤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무슨 일, 이라고 말하려던 것을 그만둔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한가득 제 눈을 채웠다.
키드, 나. 달싹이는 입술은 계속 말을 이어가려는 듯, 혹은 금방이라도 다물 듯 떨린다. 키드는 몸을 겹친 그대로 입을 맞췄다.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흰 손을 가져가 혼란스러운 눈을 감기며 키스를 이어갔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파고들자 아, 하고 뱉으며 움찔 떨었다. 시야가 차단된 몸은 전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바닥을 보인 소울의 손에 제 손을 겹쳐 깍지를 끼며 키드는 그가 조금 말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 것을 사오는 게 좋았을텐데. 가벼운 후회가 금방 입새로 흘러내렸다.
쓰고 나서 생각한 건데... 소울 모르게 키드가 ㄼㅈ 사서 서랍에 넣어놨으면 좋겠다
그래서 분위기 잡고 하려다가 소울이 ㅈ도 없잖아..하면 겁나 능숙하게 썼으면.....ㅎ...
누군가 작정하고 일을 터뜨리지 않는 이상 임무 목록은 확실히 관리되고 있고 무기-장인 팀은 필요한 것을 골라 취할 것이다. 특별히 호출할 시에는 오전 일찍, 혹은 오후 쯤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붕 뜨는 시간이 있다. 질리는 얼굴의 엑스칼리버는 제 좋을대로 '티타임'이라 명명하고는 했다. 잠시 그 봉제인형같은 모습이 흥에 겨워 지팡이를 휘두르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에 키드는 말하던 것을 멈추고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키드, 무슨 생각하는 거야?"
삐딱하게 서있던 소울이 의아함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저게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버릇이라는 걸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건가. 키드는 작은 깨달음에 유쾌해져 찌푸렸던 인상을 폈다. 이번에는 상대가 의문으로 미간을 좁힐 차례다.
대화는 언제나와 같이 시시한 주제였다. 대부분은 그들이 몸담은 사무전에 관한 것으로, 여러 학생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기괴한 소문에서부터 특급 임무에 관한 내용까지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사용하는 말투는 진중하다기보다 그저 어린 소년들의 잡담이었다. 사신과 데스사이즈라고는 하나 아직 채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철부지에 불과하다. 소울은 아직도 자세부터 걷는 폼 하나하나가 삐딱했다. 키드는 전만큼은 아니지만 대칭을 완전히 포기하진 못했다. 서투르기 그지없는 소년들의 티타임은 어색함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그 무엇보다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티타임에 정작 차가 없는 부분까지도.
키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부드럽게 웃어보이고 대화의 끈을 잡아당겼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소울은 쾌히 응해온다. 전투도 아닌데 나답지 않게 분석적이군. 키드는 다음번엔 탁자를 하나 놓을까하는 계획을 세우며 생각했다.
키드는 사실 모든 일에 매진하는 성격인데다 기본적인 통찰력이 있기에 타인을 잘 파악하는 타입이다. 그럼에도 평소 주변인에 대해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는 않았다. 베이스만 깔아둔 후 천천히 살을 붙이면 되는 것에 매시간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판단했었기 때문에, 소울에 대한 제 태도는 꽤 커다란 폭의 지진이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며 새롭게 정보를 갱신하는 것. 지각 운동이라도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에는 진심으로 데스 더 키드라는 존재 자체가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소울에게 향하는 두꺼운 렌즈를 치우지 않은 채다.
소울은 상냥하다. 그 전제는 당장 그의 초대 파트너였던 마카 알반에게 극구 부정당할 문장이었으나 키드가 그를 바라볼 때에 가장 밑바닥, 깊은 곳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라스트 데스사이즈는 상냥하기 그지없다. 아닌 척 한다는 비아냥도 들려오지만 소울은 제 상냥함을 숨긴 일은 없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에는 재주가 없는 남자다. 블랙 스타라면 안쓰럽게도 속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키드를 비롯한 대부분은 간단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타이밍이 맞지 않게 괜히 빈정거리는 어색함 같은 것을.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키드, 나...., ...얼굴에 뭐 묻었냐?"
푸웁. 뿜어져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키드는 이런 방법도 괜찮겠다는 감상을 한다. 정말 심각해보이는 얼굴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를 고민하면서 입가를 툭툭 쳐 가리켰다.
"여기. 좀 세게 닦아내야겠어."
"...진짜야?! "
소울이 찝찝한 얼굴로 세수했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입가를 문질거린다. 키드는 턱을 괸 채 느긋하게 관찰하며 치약인 것 같다고 지적해주었다. 사실은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지만, 제 말대로 힘을 주어 닦으며 짓고 있는 얼빠진 표정이 좋았다. 이제 다 지워졌어? 키드는 미소를 지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거야? 또 그 바보같은 대칭.."
"그렇게 말하면, 난 널 보면서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건가.."
"그런..말은 아니고."
소울이 허를 찔린 듯 고개를 틀며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키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진다.
곧지 않게 삐뚤하고, 어지럽고, 헝클어져 있는 모양. 소울은 대체로 그런 태도였다. 달력이 통째로 바뀌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변하지 않는 그의 성정이다. 리즈는 첫만남 때부터 두 사람이야말로 절대로 맞지 않을 도련님과 양아치가 아닌가 하고 판단했다고 털어놓았었다. 실상은 도련님들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맞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또한 보기 좋게 빗나가, 두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하게 이어졌다. 키드의 대칭 철학 아래에서 소울은 제일 가는 어긋남이고 이단 투성이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깊은 신뢰를 얻었다. 룰의 세계에 무법자라는 것은 VIP나 다름이 없지 않나. 키드는 자주 그런 생각을 떠올려 곱씹었다.
마침내 '편애'라는 단어까지 다다르면 사색은 끝이 난다. 어느새 소울은 잔가지가 많은 머리를 정돈하고 있다. 신경쓰이게 했나. 가볍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손끝을 간지럽히는 머릿결은 생각보다 푹신하다.
"저기... 이건 무슨 뜻이야?"
소울이 이의를 제기하며 해명을 요구했다. 이제 됐어, 하고 키드는 짧게 답한다. 소울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짧은 숨을 뱉으며 알아들었다는 말을 대신했다. 근데 정말 이제 의자 정도는 놓지 그래, 하고 화제를 돌리면서.
"안 그래도 다음에 이쯤 탁자를 놓을 생각이야. 눈여겨봐둔 디자인이 많지. 아, 그러고보니 그 얘기를 깜빡했군."
"설마 탁자를 같이 고르자는건 아니겠지, 키드.."
"무슨 소리야, 소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 골라야지."
"이봐, 난 호출받아서 오는 거잖아?"
소울이 적절하게 트집을 잡았다. 상대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 말은 합당한 내용이었다. 소울은 무기의 주인이자 데스 시티의 통치자인 사신 데스 더 키드의 호출을 받는다.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다. 다른 데스사이즈들, 특히 해외 지역에 거주하는 무기들은 부재중인 때가 빈번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건이 되지 않아 임무를 거절하기도 했다. 적어도 소울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키드는 충분히 그 점을 알고 이용할 수 있었다. 와서 얘기나 하자는 시덥잖은 호출도 뿌리치지 않는 그, 파트너쉽과도 닮은 충성심을.
덕분에 소울은 데스 룸이 집보다도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투덜거리는 말이 퍽 일상적이다. 역시 다이아무늬 탁자가 좋겠어, 시메트리하군. 한마디 던져놓자 금방 발끈하며 물어온다. 다이아는 안 어울리잖아.
"고르는 걸 도와주겠다니 고맙군."
"내가 언제?"
"그렇다면 역시 고양이 무늬인가? 블레어와 닮은.."
"그건 더 안돼!"
무얼 상상했는지 적극적으로 외치며 만류했다. 키드는 검지를 들어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들었다. 어차피 반쯤 걸쳐져 아슬아슬한 꼴이었지만.
소울은 만날 때마다 그런 건 벗어도 되지 않냐고 지적하나, 이것도 일종의 습관인 셈이었다. 그나마 소울을 호출할 때에나 반이라도 벗어보인다는 사실을 본인만 몰랐다. 둔한 건 불치병이라고,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전투 센스는 좋았다. 적의 움직임이나 계획, 그리고 함정에는 놀랄 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러나 신은 공평하게 그가 자신에 대한 일은 그 반의 반만큼도 잘 알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키드는 소울의 그런 점조차도 사랑하고 있었다.
사신 데스 더 키드는 소울을 사랑하고 있다. 모든 감정을 뭉뚱그려 그 한 단어로 정의할수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집약한다면 제일 근접할 수 있는 말이다. 무기인 에반스를 매우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사신이라도 그리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사람의 감정을 넘어서 초월적이라고 해도.
사랑의 세계에는 다양한 것들이 살고 있다. 사신은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가지만을 골라 가졌다. 흔히들 아가페라 칭하는,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가질 수 없는 사랑을, 한 존재에 대한 지지와 애정을 넘은 희생과 기쁨을.
그런 이유로 데스 시티가 더욱 더 소중했다. 에반스를 품은 장소를 거울을 통해 지켜보는 것은 키드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 뛰어노는 아이들도, 주인과 산책하는 강아지도, 가로등 옆에 자그맣게 핀 꽃도, 너와 함께 있는 모든 것들이 몸 안의 심장과도 같다. 내가 지켜야하는 것은 전부 너다. 키드가 그 생각을 멈추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심중을 소울이 알게 되는 날조차.
키드는 그저 직통으로 그를 호출하고 데스 룸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매번 비슷한 시간에 맞춰 걸어오는 모습이 있다. 상사의 횡포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꼭 온다. 심술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키드가 소울에게 향하는 것들 안에는 들어있지 않은 종류다. 지켜보던 것을 바로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싶다. 그뿐인 행동에 소울이 응해준다. 그걸로 충분한 일이다.
"..뭐, 아무튼 다음에 호출할 땐 의자라도 준비해두라고."
소울이 몸을 틀며 말했다. 키드가 의아스럽게 눈을 뜨고 보다가 웃었다.
"시간이 꽤 흘렀나보네."
아무래도 과하게 시간을 빌려 쓴 모양이었다. 데스 룸으로 들어오는 걸음이 당당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슈타인은 그 단어를 절절하리만큼 실감했다.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우선 제일 근간이 되는 사신의 교체부터가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사무전에 감도는 분위기 또한 그러했다. 맨 마지막,달에서의 전투를 담당했던 것은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완벽한 반전, 그리고 성공적인 결과. 더불어 키드의 각성과 함께 사무전을 완전히 떠나게 된 사신의 부재는 판도를 완전히 뒤엎었다. 차기 사신을 '데스 더 키드'가 맡게 되면서부터,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학생들은 사무전의 주역 자리를 꿰어찼다.
모두 바뀐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 일례로 데스사이즈가 된 소울은 실전에 투입이 잦아졌고, 그 과정에서 제일 파장을 맞추기 쉬운 슈타인과 페어를 맺는 경우가 빈번했다. 선생인데, 라고 항의해보았지만 오히려 '선생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키드는 아직 부족한 면이 있지만 강단이 있어 차기 사신에 적임자였다. 그래도 전대 사신보다 융통성이란 것이 있기 때문인지 최대한 수업 시간을 피해 호출해왔다.
참 웃긴 일이지. 아직 선생의 눈에는 핏덩어리처럼 어려보이는 아이들이 어느새 이만큼 성장해서, 되려 어른들을 지키고 사무전을 유지해간다.
...
그런 감성에 푹 젖어있을 때에 호출이 들어왔다. 슈타인은 피던 담배를 미련없이 바닥에 떨구었다.
-되도록이면, 다른 파트너를 붙이고 싶었다만... 여유가 없군.
곤란하다는 어조로 키드가 덧붙였다.
그 말에는 확실히 동감했다. 광기에 동화되기 쉬운 슈타인에게 이미 광기 침식된 무기를 퇴치하는 임무. 거기에 파트너는 마리 묠니르가 아닌 소울 이터. 똑같은 데스 사이즈라도 둘의 차이는 여실했다. 그럼에도 마리를 기다릴 수 없을 만큼 급한 모양이었다. 키드는 이럴 때에 마리가 부재중인 것에 대한 한탄을 표했다.
*
광기. 뼈에 사무치게 잠식되어가는 감각. 오감이 미치도록 예민해져 신경이 날카롭다. 멀리, 아주 멀리 있는 풀벌레 소리까지도 고스란히 귓가에 전해져온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잡아챈다. 마치 바로 곁에서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들리는 말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비현실적으로 울리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휘저었다. 저질러버려. 주문처럼 반복해서 되뇌인다. 해버려. 나라면 그렇게 할텐데. 부추기는 태도가 노골적이다. 그럼에도 그 뻔한 수작에 거짓말처럼 걸려드는 자신이 있다. "어이, 무슨 일이야?! " 무기인 채인 소울이 다급하게 외친다. 아직 싸움은 진행형, 팽팽하게 대치 중인 주제에 슈타인은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상대는 강적이 아니다. 하지만 능력과는 별개의 요소가 슈타인의 발목을 잡았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파장, 확실하게 느껴지는 그 성질은 틀림없이 익숙한 광기였다. 몇 번이나 슈타인을 휘어잡고 흔들어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 살금살금 뇌 언저리를 갉아먹으며 지금 터무니없는 것을 종용하고 있다. 빠득 이를 갈며 손에 힘을 주자 소울이 다시 한 번 말을 걸어왔다. 슈타인!! 고함치는 목소리가 쉬어 있다. 계속되는 대전에 지친 기색이 보였다. 아직 소울의 체력으로는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슬슬 끝내야 하는데도, 귓가에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망가뜨려.
급기야 그 말이 속삭여졌을 때에, 슈타인은 기괴한 표정으로 고개를 꺾으며 웃었다. 소울이 숨을 집어삼키며 어지러운 정신을 부여잡는다. 낯설지 않은 감각에 신경이 곤두선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눈이 똑바로 자신을 향해온 순간 소울은 숨이 턱 막힌다고 생각했다. 저 눈, 저 흔들거리는, 낄낄 비웃어대는.
[마카, 뭘 하고 있는거야...?]
검은 피, 침식당했던 마카의 모습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휘어잡는다. 닮았다. 영락없는 광기의 영향이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이것이었나. 닿아있는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슈타인!!" 소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목이 쉬도록 외치는 일 뿐이다. 언제나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 지점이다. 마리와 같은 힘이 소울에게는 없었기에, 그 부재감을 뼈저리도록 인식한다.
붕붕 휘둘러대는 행위는 조금의 조심성도 경계심도 없다. 잡히는 대로 찍어누르고 돌리며 정하지 않은 타겟을 향해 날았다. 호흡이 맞지 않는다. 억지로 끼워맞춘 영혼의 파장이 흔들거려 어지럽기까지 하다. 일순 치밀어오른 구역질을 눌러삼키며 소울이 쉰 목소리로 뚝뚝 그의 이름을 흘렸다. 슈,타인. 가만히 있어도 턱없이 부족한 체력이 정신없이 깎여나갔다. 지금 소울의 목소리는 슈타인에게 닿지 않았다. 적은? 적은 어디에 있지? 살피는 순간 챙강, 하고 마찰해오는 날카로운 금속이 몸체를 긁고 지나간다. 크으윽! 긁어내는 듯한 신음을 뱉었다.
-저 녀석, 어떻게 해버리고 싶잖아. 그렇지 않나?
슈타인은 까마득하게 어두운 공간 안에서 목소리를 듣는다. 끝없이 깊숙한 곳의 본능을 끌어당기는 음성. 제 본심과 틀리지 않아 부정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 녀석' 이 누군지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지금보다 더 많이 어지럽히고 싶은 욕망 또한 틀리지 않았다. 아, 또 다시, 미로 같은 곳에 갇히는 건가.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으면 온통 까만 허공에 이상한 형상이 떠오른다. 연기, 아니면 아지랑이. 몽글몽글하게 떠오른 하얀 물질은 부글거리며 뭉쳐 사람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누군가가 공들여 조각하는 양 구체적인 부분들까지 완벽하게 닮아가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소울.
삐죽한 머리, 탁하게 내려앉은 붉은 눈, 따분한 인상. 하얗게 주변을 밝히는 소울 이터의 모습을 한 무언가. 알고 있지만, 감정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소울, 이라고 한 번 부르면 뇌내는 틀림없는 그로 인식하고 만다. 이성을 제친 감각. 소울이 짓궂게 웃어보인다.
-하고 싶잖아.
헤죽 벌린 입에서 읽혀버린 속내가 드러난다. 슈타인은 가늘게 뜬 눈을 빛냈다. 저 모습, 저 상태, 그리고 다른 영혼. 새까만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껍데기는 동일하지만 안에 든 것은 별개의 것이다. 그렇다면 괜찮지 않을까. 귓전을 울리던 목소리가 골을 타고 뇌를 울려 생각을 마비시킨다. 생각을, 할 수 없다.
-..저질러버려.
하나 밖에는.
정신을 차리면 손끝에 걸리는 것은 소울의 옷자락이다. 아니, 소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슈타인은 제 생각을 비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받아들이다니.
평소라면 그 손을 거두어 옷을 추슬러 줄 테였다. 추악한 욕구를 억누르며 짐짓 좋은 선생의 웃음을 가운처럼 걸치면서 끝낼 것이다. 머뭇거리면서도, 힘을 들이면서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부서지기 쉬운 것은 깨뜨리지 않기 위해 오히려 힘을 주어야 하는 법이다. 슈타인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견본품이라면, 그것이 깨뜨려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굴러가는 돌은 멈추지 않고 끝없이 굴러떨어진다. 옷을 잡아뜯고 거침없이 속살을 매만지며 입을 맞추었다. 그 감각만큼은 진짜와 무섭도록 닮아있다. 셔츠를 말아올리면 드러나는 그 때의 상처마저 동일하다. 아, 이것은, 진짜다. 슈타인은 찢어지도록 입을 벌려 웃었다. 소울, 소울 이터. 한껏 벌린 입으로 사정없이 목줄기를 물어뜯는다. 거죽이 벗겨지고 물처럼 셔츠를 적신다. 움찔거리는 몸을 누르고 안아 품에 가둔 채 애무한다. 제 몸에 비해 한없이 작은 신체는 사정없이 떨기 시작했다. 욱,웃.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에 슈타인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보인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채 눈물로 잔뜩 젖어있다.
-슈...타인..
-....!
-아, 아파...괴롭.
아니다. 틀려. 슈타인은 두 손으로 축축한 얼굴을 감쌌다. 진짜일리가, 없어. 다른 물건이 아니었나?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꼬여간다. 칠흑같은 어둠이 소용돌이쳐 어딘가로 빨려들어간다. 점점 밝아지는 가운데에서 슈타인은 온기를 잃어가는 소울을 안고 있었다.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다. 밝았던 그 색은 주변에 묻혀 오히려 어두웠다. 슈타인은 하릴없이 사라질 것 같은 존재를 부여잡았다. 감각이 모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 팔 안의 소울이 움칠 몸을 떨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부릅뜬 눈으로 슈타인이 눈을 맞추었다.
반도 채 뜨지 못한 눈으로, 소울이 안간힘을 쓰며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슈타인..
"슈타인!!!!!"
"....!!"
순간 날아온 공격을 가드하며 슈타인은 눈을 떴다. 그 적막한 공간에 갇히기 전 보았던 풍경과 같다. 싸우던 곳은 들판, 광기로 질식사 할 것 같은 파장의 향연. 저만치 멀게 들렸던 소울의 외침이 확실하게 전해졌다.
"..폐를 끼쳤군요."
알면 제대로 하라고. 소울이 타박하며 날을 세웠다.
광기의 파장은 더 이상 슈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았다. 저쪽에서도 깨달았는지, 발악을 하듯 기를 방출해왔다. 슈타인은 낫을 한차례 회전하고는 꽉 쥐며 외쳤다.
"영혼의 공명!"
"영혼의 공명!!"
"..끝난 거지."
소울이 다소 지친 기색을 보였다. 슈타인은 긍정적으로 답하며 나사를 몇 바퀴 돌렸다. 휘잉 소리와 함께 무기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피곤이 쌓였던 건지 비틀거리는 몸을 받아 지지했다. 하아. 내뱉는 것은 안도의 숨이었다.
"..보고..하기 전에 물을 게 있는데."
"소울."
"......"
말을 가로채가는 반응에도 소울은 가만히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슈타인은 계속 그를 붙잡은 채 몸을 돌리게 해 마주보았다. 의외로 반항 없이 응해왔기 때문에 또 다시 그 곳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마주치지 않는 시선은 확실히 그의 것이다. 아, 어째서 그 안에서는 그렇게 분간하지 못하고 헤매었는지. 소울. 단단히 껴안아 벗어나지 않도록 하며 귓가에 속삭인다. 소울. 그제서야 바르작거리는 반응에 안심하고 만다.
"뭐,하는..!"
외치려 하는 입에 제 입술을 붙여 봉한다. 그것만으로도 몸 안의 피가 세차게 회전하는 느낌이 든다. 잃을 뻔했던 것은 제대로 품 안에 가지고 있다. 그 간단한 사실을, 다시 광기같은 것에 빼앗기게 된다면. 그런 것은 가정으로 족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떠올리는 입맞춤은 평소보다도 부드럽고 끈질겨서, 소울은 완전히 슈타인에게 기댄 채 힘겹게 받아냈다. 그래도 왠지 슈타인의 상태는 평소와 달라, 신경쓰이고 마는 것이었다. 목을 더듬어오는 입술은 쪼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와 간질간질했다. 왜 이러지, 하며 난처해하다가도 결국 한숨을 쉬며 제 목에 두른 팔을 살짝 쥐었다.
보건실 안은 후텁지근하게 덥혀진 공기로 가득했다. 정확히는 커튼으로 가려진 침실 안을 한정하여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두 사람분의 체온이 겹쳐 만들어낸 온기가 침상에 머물러 있었다. 슈타인은 단조로운 디자인의 머그컵에 막 데운 포트의 물을 따르고 커피통 안의 가루들을 알맞은 비율로 떠 넣었다. 스푼으로 휘휘 젓자 올라오는 연기에 익히 아는 향이 실려 퍼진다. '커피는 별론데.'그새 냄새를 맡았는지 커튼 너머에서 볼멘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탄 겁니다.' 짓궂게 답하며 동그란 쟁반에 받쳐들었다.
커튼을 걷고 들어가자 땀 냄새와 섞인 미묘한 냄새가 난다. 돌연 파고들어온 커피 향에 몸을 늘어뜨리고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소울이 고개를 돌린다. 가슴께까지, 애매하게 덮고 있는 이불 밖으로 보이는 것은 맨몸이다. 슈타인이 침상 옆 협탁에 쟁반을 놓았다.
"옷은 바로 옆에 뒀습니다."
소울은 졸려보이는 눈을 꿈벅거리다가 자세를 고쳐앉으며 알아, 하고 답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내리깔지만 추워하는 기색이 훤히 보였다. 뒤처리 후, 옷은 가지런히 개어두었는데도 부러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물론 처리..해줬지만, 그래도 조금 찝찝하니까 말야."
말하는 도중 돌아가는 시선이, 어색한 손의 동작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와 그의 옷을 번갈아보던 슈타인이 알겠다는 듯 입술을 움직여 웃었다. 소울은 전반적으로 헐렁한 성향을 갖고 있었으나 예상 외의 부분에 예민한 구석이 있다. 깨끗이 해주었다고는 하나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샤워를 하지 못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몸을 덥히기 위해 선호하지도 않는 커피에 손을 뻗는 모습이 소울다웠다. '커피는 별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얄미운 말투에 충실해 말을 건네자 칫,하는 소리를 내며 혀를 슬쩍 내민다. '뜨거워.' 이어 몸을 잘게 떤다. 확실히, 아무리 보건실이라도 맨몸에 얇은 이불 한장은 부실한 조합이다. 슈타인이 집어들었던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엉? 이제는 이불로 온몸을 둘둘 말다시피한 소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슈타인은 옷 위에 걸친 가운을 벗어내렸다. 이곳저곳을 얼기설기 기운 낡은 가운은 그리 두꺼운 재질이 아니다. 그래도 맨몸보다는 낫겠지. 판단을 끝낸 슈타인이 성큼 침상으로 다가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는 소울의 이불을 치우고 가운을 씌우다시피 걸쳐주었다.
분명 속옷도 입지 않은 채였지만 극단적인 체격의 차이는 한벌옷처럼 소울의 몸을 커버했다. 온몸을 덮다 못해 질질 끌릴 정도로 헐렁하고 길어 소울은 잠시 패배감마저 느껴야만 했다. "소매는 또 왜 이렇게 긴거야?!" 경악하며 소매를 마구 접어올리는 손길이 다급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슈타인이 그제서야 앞에 앉아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목에 손이 닿자 가벼운 간지러움이 주변 피부를 근질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울은 가만히 보살핌을 받기로 했다. 다른 옷보다 단추가 큰 편이라 수는 많지 않다. 하나씩 채워가며 목에서 가슴으로, 배쪽으로 내려간다. 사락거리며 옷을 스치는 소리가 괜히 크게 다가와 시선을 애꿎은 이불에 꽂는다. 특히 오므려지다 만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부위에 다다랐을 때에는, 슈타인이 잠시 손길을 멈추었기 때문에 절로 몸이 긴장했다. 아주 잠깐,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는 침묵이 흐른 후에야 슈타인이 후우, 하고 복잡한 숨을 뱉고 손을 움직였다.
"...뭐야."
가운을 다 입혀준 후, 이불까지 제대로 싸매주고는 태연하게 뒤돌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에 소울이 입을 삐죽거렸다. 묘한 분위기 형성해놓고 커피가 넘어가냐. 삐딱한 어조 뒤에 숨긴 말을 캐치했는지, 슈타인이 고개를 돌려 웃음지었다. 그 눈빛이 사뭇 달라 소울이 멈칫거렸다.
"한 번 더 하고 싶다면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그렇게 선포하는 통에 당황을 감출 길이 없었다.
"진짜 운다고, 나." 소울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슈타인은 답지 않게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